처음 계란 후라이를 할 때가 생각납니다. 수십 번 보았고 수백 번 먹었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그 요리를 저는 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프라이팬에 올라간 달걀의 뒷면은 딱 달라붙어서 타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뒤집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모양이 망가지면서 꺼먼 형태의 음식물 쓰레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결국 어머니 몰래 그 첫 번째 계란 요리를 버려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계란 후라이를 하기 전에 기름을 두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바느질을 했던 경험도 생각납니다. 다행히 바느질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책에서 배운 대로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서 마지막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힘을 주는 순간 그동안 애써서 꿰맨 바느질 전부가 옷에서 그대로 빠져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바느질을 하기 전에 실을 두껍게 묶어서 옷감에서 실이 빠지지 않도록 하는 매듭 작업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정말 수없이 많습니다.
열심히 컴퓨터로 타이핑을 했지만 저장하기를 놓치기도 하고, 밤새도록 핸드폰을 충전했지만, 충전기 코드가 전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기도 하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다수 성도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지만,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나 인도 없이 기분 따라 상황 따라 진행해서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기도 하고 동일한 죄를 계속 반복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이나 인생에 전혀 예수님의 성품과 능력으로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그 이유는 꼭 필요한 핵심 요소가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몸만 와서 예배를 구경할 뿐, 정말 그 시간에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준비, 참여, 그리고 헌신이 없습니다. 말씀도 읽지만 들은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적용하지 못하고, 기도도 하지만 자신의 요구사항만 짧게 전달할 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나 순종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자기감정과 기분이 중심이 되어서 쉽고 편한 일에는 참여하지만 조금만 힘든 것에는 핑계를 대고 빠져버립니다. 더 나아가 사역자로 헌신자로 힘든 봉사에 참여해서 수많은 수고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사랑이 빠져 버린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영혼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빠져버린 핵심 요소를 찾아서 회복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공부합니까? 왜 예배를 빠지면서까지 일을 해야 합니까? 어째서 항상 과거에 매여 있으며, 그토록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입니까? 무엇 때문에 쉽게 실망하며, 왜 아직도 사람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왜 똑같은 찔림을 받는데 변화되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에게 지금 빠져버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을 바로잡는 급선무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첫사랑을 잊어버렸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공부에 빠진 것을, 우리의 가정에 빠진 것을, 우리의 예배에 빠진 것을,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빠진 것을 지금 찾아봅시다. 그래서 건강하고 온전하고 아름답고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새롭게 살아봅시다! 바로 지금 말입니다!
꼭 결혼하고 싶었던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어떤 여자든지 건강한 마음과 몸만 가지고 있다면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여자를 한 명 소개해 주어서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옷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소개해 준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다 좋은데 눈 옆에 아주 많이 보기 싫은 점이 하나 있어, 그것만 빼면 다 괜찮아!” 안타깝게도 그 노총각은 소개받은 여자를 만나 보았지만 결국 결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친구가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만나서 대화하는 내내 그 여자의 눈 옆에 있는 점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점이 점점 커지고 점점 보기 싫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노총각은 그 여자를 더는 만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 그 노총각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오래전에 소개받은 그 여자가 멋진 남자와 함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분명히 그 점을 가지고 있던 여자가 확실했습니다. 그 노총각은 너무나 궁금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그 흉측한 점이 눈 옆에 있는 여자와 함께 가는 남자에게, 어떻게 저 여자의 눈 옆에 있는 저런 점을 보고서도 사귈 수 있냐고 물어 보아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네 저도 저 여자분의 눈 옆에 있는 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바로 그 점 옆에 있는 눈이 너무나 아름다웠거든요!”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코로나의 시간에 들어서면서 저는 부교역자들에게 토요일마다 전화 심방을 하고 짧게 만나는 주일 예배 후에 삶으로 적용하기 위한 셀 모임과 보고서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마다 반응이 달랐습니다. 전화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토요일마다 짜증 난다고 말하는 성도도 있었습니다. 셀 모임을 통한 삶의 적용도 너무 좋다고 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런 것을 왜 해야 하느냐면서 귀찮아하는 성도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믿기가 어렵고, 예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변화가 없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초점이 자신의 감정이나 자존심이고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날마다 변화되는 성도들의 특징은 언제나 그 초점이 말씀과 하나님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따금 그 초점이 흐려지고 흔들릴 때도 다시금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리고 “말씀은 이런 상황과 사건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나?”로 자주 돌이켜서 바른 초점으로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도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났고, 주고 싶지 않은 선물을 주어야 했으며,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써야 했고,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섬겨야 했습니다. 만약 저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저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목숨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방향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잠시 그대의 눈을 예수님께로, 그대의 심장을 하나님께로, 그대의 생각을 성령님께로 옮겨서 초점 맞춰 보십시오. 그러면 보기 싫은 점 바로 옆에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여기서 끝이다, 라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순간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의 한 반 학생들 전부가 저를 왕따로 만들어서 미워한 적도 있었고, 깡패에게 걸려서 몇 시간 동안 맞아 거의 한 달이나 팔을 못 쓴 적도 있었습니다. 늦은 밤 마지막 기차를 타고 집에 오다가 술에 취한 아저씨가 휘두른 흉기에 큰 상처를 입어서 피를 많이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실패한 목회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기회들도 많았고 야간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무시당한 만남도 많았습니다. 군 생활 중에는 첫 번째 천리행군에서 낙오하였다가 길을 잃어서 절벽에서 떨어진 적도 있고 무장 공비가 쳐들어와서 유서를 쓰고 여러 밤을 뜬눈으로 보낸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망스럽고 포기하고 싶었던 날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준비해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리 목이 쉬도록 찬양을 해도 사람들은 따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밤을 새워서 기도해도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작은 문제 몇 개만 해결 받으려고 했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삶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받는 것만 좋아하고 나눌 줄 몰랐으며, 찔림받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분노만 할 줄만 알았지, 작은 것 하나라도 회개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주변의 가짜 목사들이 돈과 속임수로 건물을 지어 올리고 진정한 복음의 말씀 없이 인간적인 친분과 술수로 부흥하는 것을 볼 때, 저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절대로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기대가 끝날 때, 하나님의 기대가 시작되었고 저의 마음과 몸이 상처받을 때, 하나님의 치유가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철저히 가난해질 때, 하나님의 부유함이라는 기적을 맛보았고 제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의 끝에서 부활이 시작되듯 하나님의 모든 놀라운 시작은 저의 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들이 아프다고, 실패했다고, 그리고 끝났다고 말할 때, 솔직히 기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끝이 다가올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제대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려야 합니다.
최근에 아주 친한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그 교회까지 가서 기도도 해 주었고, 수십만 원을 써서 좋은 책들도 한아름 선물해 주었습니다. 언제든 어려움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많은 전화가 왔습니다. 부교역자 생활을 상당히 했는데도 막상 담임목사가 되어 보니 그동안 한 것은 목회가 아니었다며 힘들어했습니다. 오랜 상담을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동안, 이 힘든 개척교회를 어떻게 감당했냐고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너무 힘들었지! 하지만 나중에 깨달았어. 내가 죽을 때 주님이 사시고, 내가 끝장나야 하나님이 시작하시지! 이제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오히려 기대되기도 해. 하나님이 이 죽음 같은 사건을 어떻게 생명으로 바꾸실까 하고.” 친한 목사는 한참이나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아멘”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그대에게도 동일하게 말해 주겠습니다. 지금 그대의 무엇인가가 끝나고 있습니까? 감사하고 기대하십시오! 이제야 예수님의 무엇인가가 시작되는 거니까요!
솔직히 저는 고통의 사람입니다. 먼저 육신적으로, 많은 책을 읽느라 나빠진 시력은 이미 오래전에 심각한 상태의 비문증을 견디고 있으며 조금만 무리하면 눈에서 통증과 함께 눈물이 납니다.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므로 성대도 많이 상했고 밤이 되면 목이 항상 아파서 한여름에도 목도리를 하고 자야 합니다. 선천적으로 약한 이와 잇몸은 그동안의 수많은 치료에도 불구하고 점점 약해지고 있어서 식사 시간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통증이 있습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고 몸이 지치는 날에는 잇몸이 부어 밤새도록 치통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매일 사용하는 오른쪽 손목의 관절도 많이 손상되었고 지난 몇 년 동안 연속해서 다친 허리는 지나치게 무거운 물건은 이제 들기 어려운 만큼 약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기도의 자세로 인해 무릎이나 발목이 접히는 부분에 자리 잡은 습관성 통증은 아마도 생이 마감되는 시간까지 가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견뎌야 하는 더 큰 고통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매주 이어지는 찬양과 말씀의 준비 및 다양한 상담의 사역에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영적인 어려움과 시련이 있습니다. 아무리 한번 좋은 설교를 잘 전했다 하더라도 다시금 새로운 말씀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감이 설교를 마친 직후부터 시작되고, 아무리 좋은 상담을 마무리해도 다시금 새로운 상담이 저를 기다립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사람들의 고집스런 완고함과 이기적인 강퍅함입니다. 천개를 잘해도 한 개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하고 비난합니다. 가끔은 정말 밑 빠진 독에다 물을 계속 붓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도 있습니다. 변화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하는 성도들과 감정만 위로받으려 할 뿐 성장하지 못하는 영혼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100명의 성도가 예배의 자리에서 은혜를 받아도 오늘 나오지 못한 1명의 성도로 인해 눈물이 납니다. 더하여 사탄의 유혹과 공격도 엄청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고통들을 이겨나가느냐고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쉼을 가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강력한 해결책은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원한 분께서 유한한 육체의 몸을 입고 매일 똑같이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다시 사망의 진흙탕으로 돌아가는 그 죄 많고 약한 인간들을 위해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시며 결국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그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피를 흘려주시며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소리치셨던 그 위대한 고통 앞에 다가가 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인생은 고통과 멀어질 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고통을 껴안을 때 의미 있어 진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어떤 힘든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통을 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족함을 견디고, 어려운 시련들을 감당하며 성장한 자녀들은 바른 사람이 되었지만, 부족함을 모르고 조금만 어려우면 포기한 아이들은 어디서도 무가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고 말씀의 수고, 기도의 애씀, 헌신의 희생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에 안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승리하는 신앙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고통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게임하고 술 마시면서 힘든 사람도 있고, 아이를 낳기 위해 어머니가 감당하는 고통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견디는 고통도 있습니다. 결국 당신의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얼마나 가까이에 있습니까? 고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미 있는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과 무가치한 고통 속에서 변질되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고통이 십자가와 멀어질수록 하나님 나라와도 멀어지고, 당신의 고통이 십자가와 가까워질수록 부활의 생명도 가까와지는 것
청년 시절 한 작은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목사님께서 생선 냄새가 베어 있는 헌금을 정리하시다가 한참 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개척하고 몇 몇 안 되는 성도들의 헌금을 정리하다가 그제야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제가 헌금 정리를 하지 않지만, 그때는 몇 명 안되는 성도 중에서 재정을 관리해 줄 사람도 없었고, 성도 숫자가 너무 적어서 그럴 필요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십일조 헌금을 열어 보면 그 성도가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알 수 있었고, 어떤 헌금에서는 그 성도가 일하는 상황도 담겨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붕어빵을 팔던 한 성도는 얼마 벌지도 못하는 그 수입에서 과할 정도로 많은 금액을 감사헌금으로 바쳤고 심지어 너무 가난하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던 빈 헌금 봉투에는 간절한 기도 제목만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 헌금 봉투를 하나하나 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저는 정말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목사로서 오랜 시간을 기도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소중한 영혼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아이들 세 명을 홈스쿨링 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쓰는 아내를 생각할 때, 남들 다 가는 학원 한번 가지 못하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 어려운 공부를 해내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 목사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항상 여러 사람의 오해와 어려움을 비롯해 어쩔 수 없는 고독과 불편함을 견뎌내야 하는 가족들을 생각할 때 말입니다.
저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프고 불편한 몸을 견디며 살아가는 성도를 생각할 때, 어려운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일하는 성도를 생각할 때, 불신의 가정에서 외롭게 믿음을 지키는 성도를 생각할 때,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도 몸부림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를 생각할 때 말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애틋함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외롭게 기도하시던 예수님 때문입니다. 아무도 함께 기도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저는 정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자기 자신이든, 남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이 애틋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생하는 당신의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없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에 대한 애틋함이 없으며, 무엇보다 오늘도 나를 위해 땀과 피를 쏟으며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그분과 함께 기도하는 사역자들의 그 애틋함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그 애틋한 마음을 회복하십시오.
자신의 영혼과 가족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선교사님과 사역자들을 위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가지신 그 애틋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매우 악하고 폭력적인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무슨 일이든 다투고 싸웠으며 심하면 살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치 밝은 빛이라고는 단 하나의 비췸도 없는 캄캄한 밤과 같았고, 생명이라고는 단 하나의 피어남도 없는 사막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그 마을에 한 청년이 왔습니다.
밝고 온화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가득한 그 청년은 바로 그 어두운 마을에 빛처럼, 그 사막 같은 마을에 꽃처럼 다가온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표정과 성품을 가진 사람을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기하여 그 청년에게 이런저런 질문도 하고 말도 걸었지만, 금세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이 청년이 미워져서 본색을 드러났습니다. 처음에는 험한 말과 욕설로 공격을 했는데, 참으로 이상하게 그렇게 하면 그 험한 말과 욕설이 자신에게도 돌아와서 마음이 더 힘들어졌습니다. 다음에는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고, 발로 배를 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맞은 청년은 멀쩡한데, 때린 사람의 머리만 아프고 배에는 상처가 생겼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칼을 가져와 찌르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찔린 청년의 몸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오히려 찌른 사람의 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청년에게 함부로 했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좋은 장소를 안내해 주고 좋은 음식을 주면서 어떻게 이토록 대단하고 강력한 사람이 되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자기 가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청년의 가슴은 투명했고 그 가슴 안에는 빛나고 뜨거운 거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그 특별한 거울 때문에, 누구든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면 그대로 반사가 되어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왜 이 청년에게 욕하고 때리고 심지어 칼로 찔러도 이길 수 없었는지 알아차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청년에게 잘 주는 척 하면서 이런 저런 호의를 베풀다가 밤늦게 수면제를 탄 음식을 먹였습니다. 청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었고 거울의 능력도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그 악한 사람들은 그 잠든 청년을 죽여서 심장을 파냈습니다. 바로 그 반짝거리는 거울을 그 청년의 심장에서 뽑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다 함께 그 거울을 부숴서 하나씩 삼켰습니다. 이제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청년의 심장을, 그 청년의 특별한 거울을 조각내어 먹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잠시 후, 그들은 지금까지 악하게 살아온 삶과 특히 마지막 순간 그 청년을 잔인하게 죽인 것을 한없이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더는 남에게 악한 짓을 하지 않았고 욕하거나 싸우거나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청년은 죽어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 청년의 심장에 있던 거울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서 그 어두운 사람들의 영혼에 빛이 되고 그 강퍅한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청년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청년이 다시금 살아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라는 마을에 이미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그 청년의 이야기를 우리도 이어가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몇 년 전에 유명한 교수님께서 쓰신 신학 논문을 하나 인터넷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논문이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성경 내용과는 많이 다른 특이한 주장이었습니다. 그 논문 전체를 살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주장을 펼치게 된 타당한 이유나 각주 및 참고도서도 하나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그 저자인 교수님께 연락해서, 이런 내용을 주장하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 최대한 정중하게 여쭈어보았습니다. 참고할 만한 도서나, 그런 주장을 펼친 다른 학자가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교수님은 조금 당황하시더니 자신이 외국에서 유학할 때,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원로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겼다고 했습니다. 제가 집요하게 그 외국에 계신 교수님까지 연락을 해 본 결과, 그 원로 교수님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런 내용은 잘못된 것이라고까지 저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그 논문은 인터넷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저는 참으로 허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내용을 찾아보려고 허비한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 목사님이 신학적으로 과격한 주장을 강단에서 거침없이 하시지만, 결국 알고 보면 평생 제대로 된 책 한 권 읽지 않다가 이상한 사람이 쓴 싸구려 책 한 권의 내용을 베낀 것일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체험이 많다고 하는 장로님도 종말에 대해서 전혀 성경에 없는 내용을 하나님의 음성처럼 무섭게 주장하시지만, 결국 알고 보면 이단 사이비의 유튜브 방송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어떤 전도사님도 세상만사를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하고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하지만, 결국 알고 보면 신앙도 없는 자기 아들이나 딸의 말에 휘둘려 속아 넘어간 것들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든,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든 그것이 도대체 어떤 근원에서 나온 것인지를 주의 깊게 끝까지 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이 하는 말과 태도, 결정과 주장, 선택과 계획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끝까지 궁구하여 그 근원을 밝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근원이 분명하지 않거나 특히 그 근원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솔깃해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이유를 수천 가지로 합리화할 수 있겠지만 결국 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고, 아간이 여리고의 물건을 감춘 이유를 수백 가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결국 자기 욕망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패처럼 보인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사역, 진리를 전하고 죽은 스데반과 야고보의 삶에는 바로 그 근원에는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사역의 근원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사명이 있었습니다.
정말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바로 지금 그대의 근원을 점검해 보십시오! 도대체 왜 그토록 두려워하고, 도대체 왜 그토록 강퍅하며, 도대체 왜 그토록 간절한 것입니까? 도대체 그 근원에 무엇이, 누가 있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7:11